2021년 12월에 열렸던 용인보정동고분 사적지정 기념 학술대회에서 모두 발표를 했었습니다. 이 유적은 고고학자로서 나의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한 성과였습니다. 당시 발표 전문을 수록합니다. 카테고리는 재미있는인데 실재는 그닥 재미없을 수도 있겠습니다.

용인 보정동 고분군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김충배(국립고궁박물관)
1. 들어가며
최근 문화재청은 모든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번호를 없앴다. 이와 관련된 법령이 고시되기 전까지 용인 보정동 고분군은 사적 제500호로 불렸다. 지금은 “사적 용인 보정동 구분군”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 번호를 없앴을까. 그 근본 취지는 유적 번호는 단순한 행정적 관리를 위한 관리 번호 일 뿐 유적의 지위와 가치의 우선 순위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크다. 다시 말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용인 보정동 구분군과 경주의 대릉원은 똑같은 사적으로서 국가가 마땅히 보존하고 관리할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얘기를 서두에 꺼내는 이유는 용인 보정동 고분군의 사적 지정이 마치 무수히 조사되는 다른 유적들과 같이 그저 발굴조사 후 학술 자료로서만 남은 것이 아니라 관리되고 보호되고 활용된 배경에는 이미 그 중요성이 충분히 검토되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함이다.
이 고분군이 세상에 처음 존재를 드러낸 것은 2002년 2월 초,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기 위한 현장 조사를 시작한 첫 날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나는 경부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한 서편의 야트막한 능선들이 분명 고대 문화의 중심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소실봉 북쪽 끝단에서는 임진산성이라는 조선시대의 소규모 관방 시설이 발견되어 발굴조사되기도 했지만 남쪽으로 길게 뻗은 산록은 탄천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진 도로를 확보하고 관제하기 유리한 입지이고 드넓은 평야지대를 확보하고 있으니 관련 유적들이 조사되고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하지만 탄천 동편의 급격한 도시개발 과정에서도 별다른 유적들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었다. 다행스럽게도 보정동 보정들 일원의 넓은 평야지대와 연접한 산록은 보정지구라고 하는 공공개발사업 예정지구로 공표되고 묶여 있었기 때문에 난개발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있었다. 유적이 발견된 것은 바로 이 난개발을 막고 있었던 보정지구가 공공개발 예정지구에서 해제되면서 이루어졌다.
처음 고분의 징후를 발견하고 난 그 날 오후 보정동 고분군 북쪽으로 연접한 지금의 소실 마을 성호 샤인힐즈 아파트 단지 조성을 위해 벌목한 지점에서 또 다른 통일신라시대 유적 징후가 포착되어 당일 2건의 매장문화재 발견신고를 했다. 소실마을 일원의 조사는 당시 기전문화재연구원이 맡아 진행했었는데 조선시대 분묘유적들과 더불어 통일신라시기의 생활유적, 백제사람들의 생활유적 등이 복합적으로 조사되었다.
이 2건의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보정동 일원의 고대 유적들에 대한 정보가 누적되고 이후 진행되는 모든 개발사업 과정에서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되었고 소실마을 인근의 다른 개발 현장에서는 고구ㅠ려 석실분이 발굴조사되고 연수원-삼막곡간 도로 공사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층을 갖춘 대규모 유적의 징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용인 보정동 고분군의 발견으로 촉발된 용인시 서부지역 도심화 중심지역이 미지의 대규모 고대 도시유적의 언저리에 있다는 단서가 확보된 셈이다.
2. 발견 경위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유적은 용인시에 대한 광역 지표조사 단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발 186m의 소실봉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내려온 능선 말단부에 위치한 고분들은 처음에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빼곡한 아까시 나무와 소나무 등이 뒤엉킨 잡목 군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고분이 눈에 들어 온 것은 전원주택을 짓기 위해 터를 닦으면서 벌목을 진행한 곳에서 봉긋한 봉토를 발견하면서였다. 고고학자들이라면 봉토 고분이 갖고 있는 다양한 당시대의 정보와 의미를 잘 알기에 이 발견은 대단히 흥분되는 사건이었다. 정밀하게 주변을 수색하다 급기야 나뭇가지와 낙엽 등으로 막아놓은 도굴 구덩이도 발견되었고 처음 발견된 지점에서 10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서 도굴범들이 던지고 간 깨진 도기 호도 발견되었다. 이 도기 호가 최초 발견된 유물이다.
문제는 전원주택이다. 대규모 개발이라면 이미 당시 문화재보호법 상 분명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어야 맞다. 그런데 아무런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 전원주택 건설이 개인이 소규모로 진행하던 공사였기 때문이다. 건축주 박군자(가명)씨는 교수직으로 봉직하다가 정년에 임하여 단란한 전원주택을 짓고 노후를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미 보정동 고분군 북쪽에 붙어서 들어선 대형 평수 위주의 고급 아파트촌인 이편한세상 등이 연접해서 아마 살기에 좋았을 것이다. 이 분들은 고고학자의 뜻밖의 발견으로 그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매우 안타까웠지만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업 범위 내에 위치한 고분을 조사해서 사업을 빨리 진행 할 수 있게 하는 것 뿐이었다.
최조 고분을 발견하고 당일 유선으로 매장문화재 발견신고를 접수 시킨 다음 또다시 알려지지 않은 개발로 파괴될 운명에 처한 소실마을 유적의 발견신고를 서두로 진행한 용인시에 대한 광범위한 지표조사는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지금까지 내 손으로 편집하고 발간한 조사 보고서 중 가장 두터운 900쪽에 달한다.
3. 이후의 고고학적 조사
원래의 조사 취지가 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용인시에 대한 광범위한 문화재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시작된 사업인 만큼 발견된 보정동 고분군의 이후 진행은 당시 토지박물관의 다른 분들이 진행했다. 그 다음 날 고분 현장을 둘러보고 용인시의 협의를 진행하여 별도로 신속한 현황을 파악하고 체계적인 현황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현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고분군의 범위가 단순한 능선 말단부에 봉토분 2-3개가 있는 수준이 아닌 매우 광범위하고 규모도 큰 대형 고분군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그 사이 매장문화재 발견신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접한 건축주는 엄청난 패닉상태에 빠져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 그들은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둥그런 언덕빼기 하나가 무슨 고분이라는 것이냐. 증거가 있느냐. 어쩌면 당연한 의문일 것이다.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하고 봉긋한 고분의 봉토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줏은 항아리 몸통뿐이었으니. 이런 발견신고 후 유적 처리 문제로 건축공사는 중지되었다. 소실마을의 공사도 중지되었다. 소실마을은 대규모 아파트 건축 공사였지만 이 역시 매장문화재 기초조사는 하지 않았었다.
2002년 2월에 발견신고 얼마 후 한신대학교 권오영 교수님과 학생들이 유적 분포현황 조사를 한다고 현장 안내를 요청했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체적인 분포현황을 조사하였다. 이미 용인시와는 객관적인 유적 분포 현황을 조사하기 위한 정밀지표조사를 시행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계약이 진행중이었지만 학생들이 도심지에서의 유적 조사 의미를 학습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건축주와 향후의 유적 정리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 둥그런 언덕은 그저 흙무더기고 본인들은 정밀조사가 끝나면 기다렸다가 전원주택을 짓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개인에게는 희망고문이다. 이 유적은 분명 조사하면 할수록 중요성이 커져 사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결국은 경기도까지 나서서 긴급 발굴조사 재원이 마련되었고 2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실체를 명확히 하기로 했다. 건축주로부터 토지사용승낙을 얻어 토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모두 도굴된 고분이지만 안정적인 석실 봉토 고분임이 밝혀졌고 내부 조사과정에서 신라말기의 직구단경호와 합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부장곾이 현실 바닥에 마련되었는데 이 소규모 부장곽이 무너진 천장석으로 덮혀있었기 때문에 완형의 유물들을 다수 확보 할 수 있었다. 설실분의 입구 에서는 추가장을 위해 입구를 열었던 흔적도 확인하였다. 한 고분에서는 호석도 확인됐다. 실체가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한편 용인 수지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수지-신갈간 도로를 위해 지표조사가 실시됐다. 처음에는 보정동 고분군와 연결된 가지능선 말단부에서 도괴된 석재등을 발견하고 추정 고인돌로 보고했었다. 이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시굴조사와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고 신라 말기와 통일신라시대의 고분이 다수 확인됐다. 이중 일부는 이전 복원하여 도로 상부에 원래의 지형을 따라 마련된 공원으로 이전 복원하기도 하였다.
이제 세상에 용인 보정동 고분군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의미와 중요성이 소개되었다. 이후 수차례의 정비와 인근 지역의 개발에 따른 추가 조사 등이 이루어졌다. 현재는 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이 계획에 따라 최소한의 정비를 위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만간 용인시의 대표적인 유적 활용 전시관과 탐방시설이 들어설 것으로 보여진다.
4. 사적 지정
당초에 나는 이 유적을 경기도 지정문화재로 지정 신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후 유적 중요성과 행정적인 처리의 목적 상 국가지정문화재로 관리주체와 역할을 높이게 되었다. 실제로 사적 지정이 완료된 것은 2009년 6월이다. 최초 발견 신고 후 7년여 만에 전원주택 건축을 위한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매장문화재 관련 민원은 막을 내린 것이다. 그 사이 무수한 민원과 국가 권익위에 제소하고 다양한 구제 노력을 시도 했지만 당시 개인 건축주에게 보상 할 방법은 없었다. 나는 2007년부터 경기도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유적의 사적지정과 관련된 현장 브리핑과 지정 사유 등을 문화재위원회에 설명하고 현장에서 이들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사적 지정과 관련한 업무는 돌아가신 이근직 선생님이 맡고 있었는데 그는 경주의 무수한 사적들과 이 유적을 비교하면서 사적 지정은 격이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유적이 지정되는 학술적 예술적 보존적 가치는 외형적 규모나 출토된 유물의 화려함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이 더 중요하다고 맞섰고 그 맥락은 한정된 고분군 영역 내에서 통일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한강 유역이 신라의 관심과 활동 범위 내에 있었고 그 결정적 증거가 바로 이 고분군이며 유적이 역사의 획기가 바뀌는 신라말에서 통일신라시기까지 연속되는 양상을 띠고 있으니 사적 지정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주장하였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던 현장에서의 설전이 생각난다. 결국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용인 보정동 고분군의 사적지정 신청을 받아들이고 관보에 지정이 고시되었다.
그리고 일부 토지를 국가와 지방 자치단체가 매입해서 개인 건축주에게 보상하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이후 문화재지정을 반대하던 주변의 토지주들은 역으로 본인들의 땅이 배재된 것에 대한 민원을 제기 하기도 했다.
5. 맺음말
내년이면 용인 보정동 고분군이 발견된지 꼭 20년이 되는 해다. 그 20년의 의미가 이 학술대회에서 잘 살아 나는 듯하다. 이제는 유적의 보존보다 오히려 국민과 소통하면서 활용하는 정책들이 더욱 중요시되는 시대다.
지금과 같은 용인시의 보존 활용 노력이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
(2021. 12. 3. 용인 보정동고분군 사적지정 기념 학술대회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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